[라이너노트]
EP <타원율>의 아이디어는 2023년 재미공작소에서의 단독공연을 준비하고 있을 때 시작되었다. 당시 밴드셋으로 곡 리스트를 구성하였는데 연주 동료들의 시간이 여의치가 않아 개별 악기를 따로 연습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때 건반으로 도움을 준 싱어송라이터 고대비와 따로 피아노 연주와 함께 노래를 해보았는데 그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다양한 악기가 삽입된 것과는 달리 담박한, 이대로 피아노가 중심이 되는 앨범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때는 또 사카모토 류이치가 사망한 해였기에 그의 음악과 다큐를 더 집중적으로 듣고 보며 피아노 사운드에 대한 갈망이 매우 높았던 시기이다. 물론 내가 가진 능력으로 그와 같은 구현이 불가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의 음반 중에 오누키 타에코와 함께한 ‘UTAU’와 같은 컨셉의 앨범은 어느 정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나는 이번 EP 작업을 하며 그 앨범을 구체적으로 찾아 듣지는 않았다. 여러모로 의식하게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운드적으로 많이 참고한 것은 토드 룬드그렌의 앨범들이었다.)
그래서 초기 기획을 고대비와 함께하고, 이와 관련된 세부 작업 사항을 프로듀서인 서준호와 함께 논의하면서 음반은 구체화 되었다. 나의 첫 앨범 <잠재적 초점>이 ‘더하기’의 앨범이었다면, 첫 EP <타원율>은 ‘빼기’의 성격을 염두에 두고 작업을 하였다. 어쩌면 일부러 반대급부를 찾는 나의 삐딱한 심리가 작용한 것일 수도. 첫 앨범이 복잡했다면 첫 EP는 단순하게, 기타가 중심이었다면 건반이 중심이 되게. 그러다 보니 이번 EP는 매우 단순하게도 목소리와 피아노만 남게 되었다. 피아노 발라드 앨범. 장르 카테고리도 인디 보다는 가요 쪽에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었다. 사실 나는 가요를 열심히 들으며 성장했던 세대라 그 자장이 절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타원율>에는 옛 가요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알게 모르게.
이하는 개별 트랙에 대한 설명이다.
1. 갇힌 새
2010년도쯤 밴드를 하고 있을 때 작곡했던 곡이다. 그때 당시 밴드 멤버들에게 초기 버전을 들려줬던 기억이 있는데, 너무 발라드스럽다는 의견이 있어 실제 세션까지 가지는 못했다. 하지만 때때로 주변 지인들에게 들려줬을 때 반응이 좋았던 곡 중의 하나. 그래서 이번 EP를 준비하면서 가장 먼저 떠올랐다. 고층 빌딩 위에서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며, 어쩐지 불안해 보이는 연인을 지켜보는 화자를 상상하며 곡을 만들었다. 도시와 새, 남자와 여자, 떠남과 남음. 좋은 구도라고 생각했다.
2. 성야
EP에 삽입된 노래 중 유일하게 현시점에서 작곡한 곡. 이 노래를 발표하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타원율>이 기획되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23년 크리스마스이브에 문득 악상이 떠올라 방안의 피아노를 만져가면서 코드와 멜로디를 구성했던 기억이 있다. 노래는 불과 몇 시간 안에 윤곽이 드러났고, 다음 날인 성탄절에는 가사까지 모두 완성할 수 있었다. 나 스스로에게 주는 성탄 선물이자, 나만을 위한 캐럴을 획득했다는 생각에 마음 뿌듯했다. 노래 자체는 차가운 마음으로 성탄을 바라보는 화자의 아슬한 온기를 그 안에 담아 두고 싶었다.
3. 잠든 밤, 깨어있던
인생 가운데 참 추웠던 시절이 있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집 앞의 개천을 밤낮 없이 쏘다니는 것 외에는 달리 구원의 방법이 없던. 마음마저도 차가웠던 시절, 유일하게 온기를 주었던 존재를 생각하며 노래를 만들었다. 물과음이 전할 수 있는 나름의 러브송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아직도 노래를 들으면 그때의 풍경이 고스란히 눈 앞에 펼쳐져 새삼스럽다. 연주를 한 고대비의 피아노 편곡이 빼어나 첫 데모 연주를 듣고 무릎을 쳤던 기억도 난다.
4. 흐르는 방
조금 과장되어 표현하자면 나의 모든 노래는 방에서 출발한 노래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그 방은 폐쇄적인 것이 아닌 개방적인 공간으로 여기고 있다. 비유하자면 사방이 벽으로 막혀 있더라도 천장은 뚫려있는 것 같은? 갇힌 방안에 나라는 존재는 분해되어 네가 있는 곳으로 흘러간다, 그렇다면 우리 사이를 가르는 물리적인 장벽 따위는 아무런 의미나 역할을 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화자의 마음을 담고 싶었다. 어두운 밤에 참 어울리는 노래이며, 곡 구성을 한 프로듀서 서준호의 센스가 돋보이는 노래라고 생각한다.
5. 조금 더 확실히
개인적으로 추억이 많은 아주 오래된 곡. 언제 만들어졌고 어떻게 주변에 들려졌는지 확실히 기억한다. 그렇기에 노래를 들을 때마다 아련해질 수밖에 없는데, 그런 느낌을 최대한 곡에 녹이고 싶었다. EP의 트랙 중, 가장 결이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 또한 이 노래가 일종의 출구 같은 역할을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추억의 입구 같은 곡이 마지막 트랙에 자리 잡게 되면 계속 곡 순서 안에 머물게 하는 힘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바이닐의 지직거리는 느낌, 로즈 키보드의 아련함과 홈레코딩 스타일을 그대로 살린 이유도 바로 그런 의도였다. 사실 이 노래의 보컬 전체 트랙(더블링 포함)은 신규 녹음을 한 것이 아니라, 데모 트랙에서 그대로 따온 것이다. 그것이 훨씬 더 곡의 내성적인 분위기에 더 잘 어울린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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