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 ‘불과 글’에 대해]
이탈리아의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이 쓴 에세이집 『불과 글』 의 표제작은 한 에피소드를 인용하며 글쓰기에 대한 담론을 시작한다. 독일에서 태어난 유대 철학자 ‘게르숌 게르하르트 숄렘’은 유대 신비주의에 관한 그의 책 마지막 부분에서 ‘요세프 아그논’에게 전해들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기록했다고 한다. 나는 아감벤이 전한 내용을 이 글을 통해 한 번 더 재인용한다.
하시디즘의 창시자 ‘바알 셈 토브’는 아주 힘든 문제를 해결해야 할 때면 숲속을 찾아가곤 했다. 그리고 어는 한곳에서 불을 피우고 기도를 올리면 그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졌다.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바뀐 뒤 그의 뒤를 ‘이은마지드 메세드 메세리치’도 같은 상황에 봉착하면 숲속의 그곳에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더 이상 불을 어떻게 피워야 하는지는 모르지만 기도는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드리면 모든 것이 그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다. 시간이 더 흐르고 그의 뒤를 이은 랍비 ‘모세 라이브 사소프’도 힘든 상황에 처할 때면 숲속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더 이상 불도 피울 줄 모르고 기도도 어떻게 드리는지 모르지만 이 장소만큼은 알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그의 말처럼 장소를 아는 것만으로 충분했고 그의 희망은 곧장 현실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시간이 좀 더 흐르고 세대가 또 바뀐 뒤에 랍비 ‘이스라엘 리신’은 어려운 상황에 부딪히자 성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도금된 의자에 앉아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더 이상 불도 피울 줄 모르고 기도도 드릴 줄 모르고 기도드리는 숲속의 장소도 어디인지 모르지만, 이 모든 것을 글로 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모든 것이 랍비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다. - 『불과 글』, 조르조 아감벤, 책세상 (2016)
인류가 시간이 흐르는 동안 신비의 근원으로부터 계속해서 멀어졌고, 불과 장소와 주문에 대한 전통적 가르침에 대해 결국은 천천히 기억을 잃고 말았지만, 여전히 이 모든 것을 이야기(문학)로 전달할 수 있다는 하나의 비유로 아감벤은 내용을 해석한다. 나는 이상의 흥미로운 글을 읽으며 동시에 국문학 영역 안에서 기록된 가장 오래된 노래인 ‘공무도하가’를 떠올렸다. 또 한 번 이야기를 인용한다.
고조선의 뱃사공 ‘곽리자고’가 어느 날 새벽에 머리가 새하얀 미치광이 사나이, ‘백수광부’라고 기록되어 있는 위인이 머리를 풀어헤친 채 술병을 끼고 비틀거리면서 강물을 건너는 것을 보았다. 아내가 따라가면서 말려도 듣지 않고, 사나이는 마침내 물에 빠져 죽었다. 아내는 강을 건너지 말라는 뜻으로 “공무도하”라는 말로 시작되는 노래를 불렀는데 소리가 아주 슬펐다. 노래를 다 부르자 아내도 빠져 죽었다. ‘곽리자고’가 집에 돌아와 자기 아내 ‘여옥’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여옥’은 그 노래를 다시 불렀다. 노래를 듣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 『한국문학통사』 조동일, 지식산업사 (2007)
창작자는 자신의 창작을 ‘장악’할 수 있을까? 나의 오랜 질문은 이것이다. ‘이 노래는 나의 노래’라고 나는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는가? 그에 대한 해답을 나는 이상의 이야기들을 통해 애써 찾는다.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히스토리) 속의 전달자이다. 그리고 ‘잘 전달된’ 이야기는 소원이 이뤄지며, 눈물을 훔치게 된다. 나는 이 두 과정을 동일한 결과물로 본다.
존재를 있는 그대로 모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어떠한 뛰어난 예술가도 봄의 색을, 새의 소리를 완벽히 옮길 수는 없다(고화질 사진이나 무손실 음원이라도 마찬가지이다. 프레임 안의 그것을 동일한 그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논리적 근거가 우리에게는 없다). 결국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최선의 판단은 망실의 시간을 인정하며 그것을 잘 전달될 수 있도록 세공해 재창작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그 이야기를 가장 온전히 전달할 수 있는 주요한 방법임을, 해당 에피소드들은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인용에 재인용을 더 하면서, 그렇게 구술되고 서술되면서…….
그렇듯 노래가 만들어질 때면 겸손해 진다. 한참 거슬러 오르면 나의 노래는 누군가가 불을 발견하고 무리와 함께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며 포효할 때 이미 완성되었던 것은 아닐까, 혹은 어두운 동굴 한쪽에 불을 밝혀 손끝으로 무언가 모양을 그리고 색을 입힐 때 이미 완성되었던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에 빠진다. 그렇다면 나는 시간 사이에 튀는 작은 불씨이며, 나의 역할 또한 그 불꽃을 또 다른 심지로 잘 전달하는 것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불꽃이 타는 소리로 시작하고, 도시의 소음으로 끝나는 노래 <불과 글>은 수미상관의 음악이다. 불꽃 앞에서부터 이어진 인류의 문명을 소급하는 과정으로서의 소리, 그리고 그것을 태우는 재료로서의 글들. 이상의 나의 작업이 은총을 입을 수 있다면, 기원의 장소와 기도문과는 사뭇 형태는 다를 지라도 그 불꽃은 이어진 심지들을 통하여 절대 꺼지지 않을 것이며, 눈물도 결코 마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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