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우리나라 레코드 산업이 한창 호황일 때는 유명 뮤지션들의 앨범뿐만이 아니라 싱글들도 꽤 많이 수입되었던 기억이 있다. 지금처럼 디지털 싱글 개념이 없을 때라 피지컬 레코드를 채우기 위해서는 싱글 트랙뿐만이 아니라 비사이드나 라이브트랙들을 넣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나는 그러한 희귀성 때문에 싱글을 구매하는 즐거움에 푹 빠져있었다. 특히 비사이드 곡들은 대개 뮤지션의 새로운 시도나 데모트랙, 앨범에 수록하기는 좀 그래도 버리기는 또 아까운 노래들이 선택되는 것 같았다. 앨범마다 아웃테이크를 만들 수밖에 없는 뮤지션들의 입장에서나 나처럼 희귀트랙을 찾는 팬들로서는 서로 썩 괜찮은 방식이었다.
이런 기억 때문인지 나도 내 이름으로 싱글을 어떤 형태로든 발매하게 되면 앨범에는 수록되지 않을 비사이드 곡을 꼭 넣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마침 나 역시 발표되지 않은 데모곡들을 잔뜩 가지고 있으며 그중의 하나가 바로 <80호>이다.
이 노래가 만들어질 때는 잭 캐루악의 <길 위에서>를 읽고 있을 즈음이었는데, 그 영향인지 로드무비 같은 노래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가볍게 접근해 보았다. 가사는 미국의 지루하고 외롭기로 유명한 50호 국도를 고려하면서 썼는데, 그 끝없이 이어지는 도로를 달리면 어떠한 느낌일까 상상해 보았다. 그렇게 속도도 시간도 느끼지 못하고 달리다 보면 맞은 편에 다가오는 자동차 한 대도 여간 반갑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맞은 편에 다가오는 차가 신기루였다면? 혹은 달려오는 것이 아니면 내 앞으로 날아오고 있었다면? 뭐 그래도 외로운 처지이기에 하늘 위에서 만나더라도 반갑지 않았을까? 약간은 르네 마그리트가 구현할 것만 같은 풍경을 가사에 담고 싶었다. 그렇게 시간을 잊은 공간 안에서는 뭐든 특별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다. 하지만 또 방향을 바꾸어 예정된 길이 아닌 곳을 달리는 거대한 일탈을 하고 싶기도 하고... 이상의 두 가지 마음을 <80호>라는 짧은 곡에 담아보았다. 국도 50호를 80호로 수정한 것은 단순히 내 생년을 거기에 붙인 것이다. 생이란 것도 결국 길 위를 달리는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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