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 흘러가는 것들이 잠시 정주하는 세계, 물과음이 말하는 앨범 [잠재적 초점] 속에 퇴적된 언어들
음악이 ‘듣는다’는 행위의 영역에서 벗어나면 어떠할까? 싱어송라이터 물과음이 그간 활동을 엮은 데뷔 앨범 <잠재적 초점>을 통해 듣는 것을 벗어난 ‘체험하는 음악’에 대해 주장하며 비가시적 세계의 현현을 음악으로 구현하고자 한다. 물과 소리, 모두 손에 잡을 수 없지만 그 정주의 찰나를 섬세하게 기록한 앨범은 어떠한 고민과 과정에 의해 작업 되었는지 잠시 그 차일을 들춰보고자 한다.
SPECIAL[잠재적 초점] 해설서 (Track Commentary)
안녕하세요, 싱어송라이터 물과음입니다. 오랜 시간 제 곁을 머물렀던 몇 가지 노래들을 묶어 앨범으로 발표하게 되어 무척 기쁜 마음입니다. 제 음악을 들어 주시는 분들에게 좀 더 친절한 이해와 공감의 영역을 마련하고자 간단한 해설서를 써보려 합니다. 모쪼록 내용이 여러분들에게 제 음악이 한 걸음 더 다가가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01. 기수역 - 클래식 기타를 구매하고 문득 오픈 튜닝으로 노래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가장 먼저 완성한 곡이 바로 ‘기수역’입니다.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이라는 제목과도 같이 여성 보컬과 듀엣으로 노래를 이미지화하고 싶어 평소 목소리를 좋아하던 ‘단식광대’의 구자랑 님에게 부탁했습니다. 코러스로 이어가던 보컬 파트가 곡 마무리에 하나의 멜로디로 겹쳐지는 연출은 노래가 말하고자 하는 ‘관계적 합일’을 꽤 효과적으로 표현했다 생각합니다. 02. 퇴적 - 피아노로 작곡한 초기 곡인데 데모 형태로 존재할 때는 너무 단순한 구성이라 노래가 완성될 수 있을까 의심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곡이 변주되고 확장되어 가는 과정을 통해 문득 의미 있는 노래가 될 수 있겠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퇴적’이라는 곡 제목처럼 사운드 레이어가 가장 중요한 포인트였는데 이번 앨범의 메인 프로듀서인 서준호 님이 완벽하게 구현해줬다고 생각합니다. 침전하는 자아와 투쟁하는 이의 서사를 담은 곡입니다.
03. 적끈 - ‘적끈’은 노래의 밀도를 곡 끝까지 유지하는 것이 가장 핵심적이었습니다. 특유의 습하고 끈적한 느낌을 살리고 싶었거든요. 첫 데모는 무척 로우파이한 느낌의 곡이었는데, 프로듀서 서준호 님의 제안에 의해 다소 일렉트로닉 하게 구성되었습니다. 초기 물과음이라는 사운드 정체성을 잡을 때 굉장히 도전적으로 접근했던 것이 유효했고, 이때의 선택이 물과음의 음악을 자유롭게 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뉴스에서 본 치정사건을 기반으로 가사를 썼던 것이 기억에 납니다.
04. 실크 - 잠이 쉽게 드는 편이 아니라 심야에 홀로 창가를 바라보는 일이 잦습니다. 어둠 속 가냘픈 동산의 윤곽선을 멍하니 쫓으며, 문득 그 선에 벗어난 하늘이 실크 원단을 풀어놓은 것같이 부드러워 보였습니다. 부드럽고도 연약한 밤을 살아가는 작고 여린 이들에게 바치는 노래입니다. 최대한 홈레코딩 느낌을 살리고 싶다는 기획이 있어 실제로 싱어송라이터 박종범 님의 방에서 녹음을 했습니다. 노래 말미에 나오는 생활 소음도 실제 그의 집에서 기록한 것입니다.
05. 피핑 톰 - 앨범 안에 유니크하고 이질적인 곡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제가 주로 공연하고 있는 홍대 ‘클럽 빵’의 엔지니어 김동용 님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원래는 완성된 곡의 리믹스를 부탁하려고 했는데 처음부터 ‘신곡을 리믹스 한다’는 형태로 접근하면 어떨까 싶어 일부러 업템포 곡을 골라 자유롭게 구현해 달라고 했습니다. 덕분에 기대했던 것만큼 ‘피핑 톰’은 이번 앨범 안에서 특별한 기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사는 ‘레이디 고다이바’의 전설을 빌려 왔습니다.
06. 크림슨 - 이번 앨범의 타이틀곡. 좋아하는 여성 뮤지션을 떠올리면서 만든 헌정곡입니다. 처음에는 기타로 작곡을 시작했지만 결국 피아노로 완성한 곡이기도 합니다. 최대한 건반의 터치를 잘 살리고 싶어 밴드 ‘흐느느’에서 활동하는 느리 님께 연주를 부탁했습니다. 평소 공연 때 재즈 스케일을 멋지게 잘 활용하시기에 일부러 화려한 건반 편곡을 부탁했습니다. 특히 엔딩의 피아노 솔로는 ‘하염없이’ 이어지길 바랄 만큼 매우 좋아하고 있습니다.
07. 잠재적 초점 - 앨범 타이틀과 동명의 곡이지만 사실 그 연관성을 고려해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첫 의도는 심플한 구성의 실내악이나 소품곡 같은 것을 생각했는데, 작업 과정에서 템포며 스타일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스스로 부르기에 너무 키가 높아 노래와 어울릴 여성 보컬을 생각하다 싱어송라이터 복다진 님을 떠올렸습니다. 결과적으로 나의 목소리도 좋게 들릴 정도로 무척 좋은 조합이라 생각합니다. 가사는 고대 디오니소스 축제 이야기를 기반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았습니다.
08. 불과 글(잠재적 초점 믹스) - 컴필레이션 <서울, 변두리>에 원 버전이 수록되어 있는데 앨범 발매에 맞춰 새롭게 리믹스를 해보았습니다. 개인적으로 90년대 브리스톨 사운드를 좋아해서 원 버전 노래를 녹음할 때 보컬에 이펙팅을 많이 주고 드럼 앤 베이스처럼 비트 중심으로 가고 싶었던 초기 의도가 있었지만, 구현에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이번 앨범에 수록된 버전이 제가 생각했던 초기 아이디어에 더 가까워져 뿌듯합니다. 제목은 재미있게 읽은 조르조 아감벤의 동명 에세이에서 따왔습니다.
09. 저무는 빛 - ‘물과음’이라는 이름으로 음악 활동을 이어갈 수 있게 한 가장 중요한 곡.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던 시기, 새벽 무렵 방안의 어둠 속에서 이 곡을 완성하며 문득 ‘다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데모 버전과 비교해 특별한 변형 없이 레코딩되어 지금도 들을 때마다 처음 작곡하던 순간이 떠오릅니다. 어둠 속, 켜 놓은 티브이에서 발산된 한 무리의 빛줄기가 산란하듯 방안 천장을 어지럽게 수놓았던 뭔가 서글프고도 아름다웠던 순간 말이죠.
10. 힐데콤 - 이 곡의 의도는 명확했습니다. ‘노래 전체가 다 좋을 필요는 없다. 가장 중요한 몇 초를 듣기 위해 몇 분의 시간을 기다릴 수 있는 곡이어야 한다’는 것인데, 곡의 마지막 기타를 통해 정서가 해갈되는 부분으로 만족스럽게 구현된 것 같습니다. 속이 뻥 뚫리는 기타 사운드는 기타리스트이기도 한 프로듀서 서준호 님의 플레이입니다. 원래는 화려한 기타 솔로도 있었지만 과하다고 삭제했던 기억이 나네요. 장르적으로 좋아하는 곡이기도 합니다. 잘 들어보면 은근히 재즈적인 어프로치가 있거든요.
곡에 대한 초기 아이디어나 접근 방식에 대해 짧게나마 설명 드렸지만 어디까지나 저의 개인적인 설정일 뿐, 여러분 개개인에게 오롯이 전달되기 위해서는 곡의 인상이 창작자인 제가 아닌 청자인 여러분과 더 가깝게 변형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변이된 소리가 여러분의 기억과 생활 속으로 스며들 때야 비로소 노래는 함께 체험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모쪼록 여러분과 제가 해당 노래를 매개로 하여 서로의 기억 속으로 아름답게 채워지고, 이어지고, 또 흘러가길 바랍니다. 소리처럼, 물처럼...
- 물과음 드림
Comments